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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금강경 읽는 밤 - 전윤호

by tirol 2005. 12. 14.
금강경 읽는 밤

전윤호


내가 잠든 밤
골방에서 아내는 금강경을 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말 안하고 생각 안하고
한 권을 온전히 다 베끼면
가족이 하는 일이 다 잘될 거라고
언제나 이유없이 쫓기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면 머리맡 저쪽이 훤하다
컴퓨터를 켜놓고 잠든 아이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속에서
경을 쓰는 손길에 눈발이 날리는 소리가 난다
잡념처럼 머나먼 자동차소리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풍경소리
나는 두렵다
아내는 나를 두고 세속을 벗어나려는가
아직 죄없는 두 아이만 안고
범종에 새겨진 천녀처럼
비천한 나를 버리려는가
나는 기울어진 탑처럼 금이 가다가
걱정마저 놓치고 까무륵 잠든다

/현대시, 2005년 4월호/


* tirol's thought

내가 잠든 밤
나의 아내도 뭔가를 쓴다.
하루에 한 시간도 넘게 읽고 쓴다.
언제나 이유없이 싸우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면 발 밑 저쪽이 훤하다.

아내가 쓰는 것이 금강경이 아니니
나를 두고 세속을 벗어날 일은 없겠지만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나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나도 기울어진 탑처럼 금이 가다가
걱정마저 놓치고 까무륵 잠든다.

아내의 학기말 페이퍼 마감 일주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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