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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폐원(廢園) - 박목월

by tirol 2005. 12. 14.
폐원(廢園)

박목월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앉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롱 솔로

눈이
오는데
옛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명동
사원 가까이

하얀
돌층계에 앉아서
추억의 조용한 그네 위에 앉아서

눈이 오는데
눈 속에
돌층계가
잠드는데

눈이 오는데
눈 속에
여윈 장미 가난한 거지가
속삭이는데

옛날에
하고
내가 웃는데
하얀 길 위에 내가 우는데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 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먼
지평선이 저문다.


* tirol's thought

첫 눈이 왔던 지지난주 토요일엔 인사동에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러 들어갈 땐 눈이 안왔는데 술을 마시고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밖에 눈이 온다고 생각하니 술은 더 술술 들어가고, 어디쯤에선가 희미해진 기억.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취해서 본 첫 눈의 풍경은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이 다음 눈 내리는 날은 시 속의 화자처럼 그윽하게 눈 내리는 풍경을 즐겨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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