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672 집 - 이윤학 집 이윤학 낮 동안, 제 집을 쫓아다닌 그림자 저녁에 문 앞에 와서 보니, 그 그림자가 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잠긴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으로부터 쫓겨난 영혼이다 나는 지금도 집에 가기 위해 목발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집을 찾아가기 위한 목발, 내 영혼도 목발을 짚고 쫓아와 있다. 평생을, 아픔을 끌고 다녀야 하다니! 나를 생각할 때만큼 고통스러운 적은 없다 /문학동네 시집 22, 이윤학 시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 * tirol's thought “나를 생각할 때만큼 고통스러운 적은 없다” 난 이 시에서 이 문장 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낭만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시인은 한 문장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제임스 조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에피퍼니’의 순간을 낚아채서 낡은 언어의 칼.. 2002. 1. 16. 엽서 - 문태준 엽서 문태준 바람이 먼저 몰아칠 것인데, 천둥소리가 능선 너머 소스라친다 이리저리 발 동동 구르는 마른 장마 무렵 내 마음 끌어다 앉힐 곳 파꽃 하얀 자리뿐 땅이 석 자가 마른 곳에 목젖이 쉬어 핀 꽃 창비시선 196, 문태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 tirol's thought 문태준. 대학시절 안암문예창작강좌에서 만났던 친구. 그 시절 읽었던 그 친구의 시에 대한 내 느낌은 '단단하다'는 것이었다. 허튼 수작 안부리고, 엄살 떨지 않는 시.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모른척 하기엔 어색할만큼의 안면. 꼭 한번 술 한잔 하고 싶었는데 그게 또 어디 그리 쉬운가, 하긴 또 어려울 것은 무엇이었던가. 2002. 1. 15. 성탄제 - 김종길 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2001. 12. 2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어느날 古宮(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왕궁) 대신에 王宮(왕궁)의 음탕 대신에 五十(오십)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제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2001. 12. 3. 너라는 햇빛 - 이승훈 너라는 햇빛 이승훈 나는 네 속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바람 부는 세상 너라는 꽃잎 속에 활활 불타고 싶었다 비 오는 세상 너라는 햇빛 속에 너라는 재미 속에 너라는 물결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세상 너라는 봄날 속에 너라는 안개 속에 너라는 거울 속에 잠들고 싶었다 천둥 치는 세상 너라는 감옥에 갇히고 싶었다 네가 피안이었으므로 그러나 이제 너는 터미널 겨울저녁 여섯시 서초동에 켜지는 가로등 내가 너를 괴롭혔다 인연은 바람이다 이제 나같은 인간은 안된다 나 같은 주정뱅이, 취생몽사, 술 나그네, 황혼 나그네 책을 읽지만 억지로 억지로 책장을 넘기지만 난 삶을 사랑한 적이 없다 오늘도 떠돌다 가리라 그래도 생은 아름다웠으므로 이승훈 시집 '너라는 햇빛' 중에서 * tirol's thought 그래도.. 2001. 11. 29. 그랬다지요 - 김용택 그랬다지요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 tirol's thought 디지털의 특징 중의 하나로 '무한 복제'의 가능성을 들 수 있겠지요. 옮기거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낡거나, 닳는 아날로그와 달리 원본의 변화가 없는 디지털의 복제방식을 생각하다보면 가끔 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저또한 스스로 책을 뒤적여가면서 새 글을 옮기거나 제 글을 쓰기보다 여기 저기에서 시를 복사해다가 올립니다.(이 시도 후배 홈페이지에서...) 생각같아선 올리는 시마다 제 생각이나 느낌을 덧붙여보고 싶긴 한데 그것도 쉽진 않습니다.. 2001. 11. 28. 이전 1 ··· 103 104 105 106 107 108 109 ··· 1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