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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겨레신문사, 2001 >>박노자 교수의 글은 주로 한겨레를 통해서 읽고 있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한국학 교수라는 프로필과 그의 이름을 보고 나는 늙스구레한 아주머니 교수를 연상했었다. 그런데, 그 늙스구레한 할머니가 쓰는 글이 어울리지 않게 과격하다 싶긴 했다. 기억나는 이야기들은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한국 대학의 교원 임용 방식이라던가 조교들이 받는 불합리한 대우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수렵에 관한 비판 등이다. (그 이야기들은 대개 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박노자 교수는 늙스구레 하지도 않았고 아주머니도 아니었다. 눈빛이 맑을 것 같은 러시아 출신의 젊은 사학자였다. 귀화 한국인으로서 그가 까발리는 한국사회의 모습은 쉽게 부정하기 힘든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2002. 11. 25.
빈 마당을 볼 때마다 - 장석남 빈 마당을 볼 때마다 장석남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어느 꽃나무 아래 앉아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풀잎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꽃이 시들고 있다 이미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도 너는 있다 빈 하늘을 볼 때마다 너는 떠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훌쩍 서 있다 나는 저 마당보다도 가난하고 가난보다도 가난하다 나는 저 마당가의 울타리보다도 가난하고 울타리보다도 훌쩍 가난하다 ―가난은 참으로 부지런하기도 하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고 너는 훌쩍 없고 없고 그러나 내 곁에는 언제나 훌쩍 없는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뿐인 심장을 만진다 * tirol's thought '훌쩍.. 2002. 11. 8.
엄마 걱정 - 기형도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tirol's thought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가셨던 건 아니지만, 나도 '찬밥처럼 방에 담겨' 천천히 숙제를 하며 엄마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그 '서늘한 유년의 윗목' 요며칠 눈밑이 뻑뻑하다. 누가 옆에서 쿡 찌르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가득찬 물잔을 들고 다니듯이 조심조심 지내고 있다. 엄마 때문이냐고? 글쎄... 2002. 11. 7.
어느 맑고 추운 날 - 박정대 어느 맑고 추운 날 박정대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 .. 2002. 11. 5.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tirol's thought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 종로 교보 문고에 붙어 있는 큰 걸개그림에서 본 기.. 2002. 6. 2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 2002.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