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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황동규

1
내 그처럼 아껴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던 어린 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는 그들을 뽑으러 나갔노라. 그날 하늘에선 갑자기 눈이 그쳐 머리 위론 이상히 희고 환한 구름들이 달려가고, 갑자기 오는 망설임, 허나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목, 오 들을 이 없는 고백. 나는 갔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그 어린 나무들의 자리로.
그런데 어느날 누가 내 젊음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노라. 나즉히 나즉히 아직 취하지 않은 술집에서 불러내는 소리를.
날 부르는 자여, 어지러운 꿈마다 희부연한 빛 속에서 만나는 자여, 나와 씨름할 때가 되었는가. 네 나를 꼭 이겨야겠거든 신호를 하여다오. 눈물 담긴 얼굴을 보여다오. 내 조용히 쓰러져 주마.

2
갑자기 많은 눈이 내려 잘 걸을 수 없는 날
나는 너를 부르리
그리고 닫힌 문 밖에
오래 너를 세워두리
희부연한 어둠 속에 너의 머리 속에
소리없이 바람은 불고
문이 열리면
칼로 불을 베는 사내를 보게 해 주리
타는 불 머리의 많은 막막함
흩어진 머리칼 아래 무심한 얼굴
혼자 있는 사나이의 청춘
그물 속의 불빛 그물 속의 불빛
뒤를 보려무나
그 사이에 나는 웃으리, 금간 얼음장에 희부연한 빛으로,
그물 속의 불빛 그물 속의 불빛
나는 너를 보리.

3
나무들이 요란히 흔들리는 가운데 겨울 햇빛은 떨어지며 너를 이끌어 들인다, 얼은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잘 왔다 친구여, 내 알려줄 것이 있다. 저 캄캄해 오는 들판을 바라보라. 들판을 바라보는 그대로 너를 나에게 오게 하는 법을 배웠느니라.
이제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은 다시 보겠는가. 네 허전히 보낸 나날의 표정 없는 얼굴을. 네 그처럼 처음을 사랑했던 꿈들을.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

/ 황동규시집, 三南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95/


* tirol’s thought

말의 무게는 현실의 무게와 사뭇 다르다.
'썩어지는 한알의 밀알이 되겠다’고 말할 때 과연 사람들은 썩는다는 말의 진정한 무게를 얼마나 느낄까. 썩는다는 것은 멋지지 않다. 유쾌하지 않다. 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다. 결국 현실의 무게를 담지 않은 언사는 수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 말의 무게를 지고 그 말을 쓴다면 읽는 이 또한 그 무게를 받아내야 할 의무가 생기는 셈이다.
너를 만나 ‘조용히 쓰러져 주는’ 일은 어떠한가.
아련하게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가득찬 시다.
허나 무게를 담아 읽으니 참 무겁고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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