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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살구를 따고 - 장석남

by tirol 2005. 2. 7.
살구를 따고

장석남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 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저녁을 맞네
더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래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 들어본다네
살구를 따고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다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 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네


* tirol's thought

내 서른 여섯살은 어떻게 기록해두어야 할까.
그저께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다가, 자세가 불편해서 소파 밑에 내려와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보다가, 다리를 쭉 뻗을 수 없는 가구 배치와 집의 크기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래도 먼 훗날 이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작은 집을 얻고, 아내와 요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쇼핑을 하고, 가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투기도 하고, 저녁을 먹고 5분거리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다니고, 늦게 집에 왔는데도 주차하기 편한 자리가 남아있으면 기뻐하고, 오래된 문틀에 페인트 칠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자꾸 미루고 또 다시 결심하고, 하던 결혼 2년차의 이 겨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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