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472

따뜻한 가족 - 김후란 따뜻한 가족 김후란 하루해가 저무는 시간 고요함의 진정성에 기대어 오늘의 닻을 내려놓는다 땀에 젖은 옷을 벗을 때 밤하늘의 별들이 내 곁으로 다가와 벗이 되고 가족이 된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실한 인연 마음 놓고 속내를 나눌 사람 그 소박한 손을 끌어안는다 별들의 속삭임이 나를 사로잡을 때 어둠을 이겨낸 세상은 다시 열려 나는 외롭지 않다 언젠가는 만날 날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그대들 모두 은하(銀河)로 모여들어 이 밤은 우리 따뜻한 가족이다 * source: www.hankyung.com/life/article/2015021520001 2021. 2. 21.
오지 않은 사람 - 이선외 오지 않은 사람 이선외 방안 가득 꽃이 피었다. 오지 않은 사람 꽃이 피었다. 오지 않은 사람이 탁자 곁에 머물러있다. 오지 않은 불빛이 흐른다. 오지 않은 사람의 눈빛을 바라본다 오지 않은 사람의 손톱을 깎는다. 오지 않은 사람의 밥상을 차린다. 오지 않은 사람과 소풍을 간다. 오지 않은 사람과 싸운다. 오지 않은 사람과의 약속 때문에 운다. 오지 않은 사람을 위해 춤을 춘다. 오지 않은 사람의 눈은 붉다. 오지 않은 사람은 울타리 밖의 텃밭 오지 않은 사람은 내가 마신 커피 향 마루 가득 오지 않은 사람들 추울 때 피는 꽃이 진짜 봄꽃이다. 2021. 2. 21.
밤의 공벌레 - 이제니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2021. 1. 31.
어부 - 김종삼 어부(漁夫)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tirol's thought 화사한 날이 오면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나는 무엇이 되어서 무슨 말을 중얼거릴 것인가 날마다 출렁거리는 작은 고깃배 어디가 뱃머리고 어디가 배꼬린가 화사했던 날이 언제인가 언제 줄을 풀고 바다로 나아갈 것인가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오늘도 중얼거린다 2020. 12. 25.
사무원 - 김기택 사무원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損害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 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신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2020. 12. 13.
풍선 - 김사인 풍선 김사인 한번은 터지는 것 터져 넝마 조각이 되는 것 우연한 손톱 우연한 처마 끝 우연한 나뭇가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많이 불릴수록 몸은 침에 삭지 무거워지지. 조금 질긴 것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네. 모퉁이를 피해도 소용없네. 이번엔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지. 어린 풍선들은 모른다 한번 불리기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뽐내고 싶어지지 더 더 더 더 커지고 싶지. 아차, 한순간 사라지네 허깨비처럼 누더기 살점만 길바닥에 흩어진다네. 어쩔 수 없네 아아, 불리지 않으면 풍선이 아닌 걸. tirol's thought 시를 읽고 나니,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하다. 하지만 배는 그러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문장이 생각난다. 시가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료해서 .. 2020.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