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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밤의 공벌레 - 이제니

by tirol 2021. 1. 31.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 tirol's thought

 

"공벌레는 쥐며느리의 일종으로 돌 밑이나 축축한 낙엽더미에서 산다. 몸은 머리와 일곱 개의 마디로 된 가슴, 다섯개의 배로 나뉜다.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만다." 

 

꽃이 지는 것이 내가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듯,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이 내가 온 힘을 다해 살아냈기 때문은 아니다. 자극을 받으면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마는 공벌레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온 힘을 다해 마음을 웅크렸다 폈다하며 살아온 세월이 허허롭다. 틀린 맞춤법으로 살아온 인생이 너의 잘못만은 아니다. 이제는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낼 때도 되었다. 작은 자극에도 습관처럼 웅크리는 마음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새 맞춤법을 익히는 데는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부끄러움을 기록하다보면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것이 익숙해질까, 언젠가는 부끄러움을 떨쳐버리는 날이 올까?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를 온 힘을 다해 노력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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