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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비가 와도 젖은 者는 - 오규원

by tirol 2003. 1. 1.
비가 와도 젖은 者는

오규원


순례 -1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오규원 시집, 사랑의 기교, 민음사, 1978/


* tirol's thought

나는 이 시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좋아한다.
'비가 와도/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라는 대목을 특히 좋아하긴 하지만,
오로지 그 구절때문에 이 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시를 좋아하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를 해석할 수 없어도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의 어떤 면(가령 웃는 모습이라든가, 전화를 받을 때의 목소리라든가)을 특히 좋아하긴 하지만,
오직 그 이유때문에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