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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발령났다 - 김연성

by tirol 2007. 4. 23.

발령났다

김연성


그는 종이인생이었다 어느 날
흰 종이 한 장 바람에 휩쓸려가듯이 그 또한
종이 한 장 받아들면 자주 낯선 곳으로 가야했다
적응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명인가
타협이란 또 얼마나 힘든 악수이던가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읽지 못할 것이다
얇은 종잇장으로는 어떤 용기도 가늠할 수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 골목의 정체없는 어둠이다
그는 늘 새로운 임지로 갈 때마다 이런 각오했다
"타협이 원칙이다
그러나 원칙을 타협하면 안 된다"

나일 먹을수록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모없다고
누군가 자꾸 저 세상으로 발령낼 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원칙까지도 타협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허리까지 휘어진 어둠 속에서
꺼억꺼억 토할지 모른다
모든 과거는 발령났다 갑자기,
먼 미래까지 발령날지 모른다

시간은 자정 지난 새벽1시,
골목 끝에 잠복해있던
검은 바람이 천천히 낯선 그림자를 덮친다

/《미네르바》 2006년 여름호/

* source: http://poemfire.com/bbs/view.php?id=yst_poemread&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1



* tirol's thought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면서
스스로의 목덜미를 부여매는 짐승을 생각한다.
저녁마다 회사문을 나서면서
하룻 저녁 동안의 귀휴를 허락받은 재소자를 떠올린다.
내 손으로 묶고
내 손으로 잠그는 인생.
가끔씩 종이 한장 받아들면
짐 싸들고 이감가는 죄수처럼
낯선 곳으로 가야하는 신세.

'허리까지 휘어진 어둠 속에서
꺼억꺼억 토'
하는 울음
가엾은 이 땅의 샐러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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