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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늦은 오후의 식당 - 엄원태

by tirol 2007. 4. 11.
늦은 오후의 식당

엄원태


그 식당 차림표에는
열 가지가 넘는 메뉴가 준비되어 있고
가격 또한 저렴한 편인데
가령, 낙지볶음은 한 접시에 기껏 오천원이다

홀 한쪽에는
주방으로 쓰는 씽크대와 장탁자가 있고
식탁은 세 개
의자는 열세 개 있다

손님은 하루 평균 여남은 명인데,
어쩌다 술손님을 한 팀 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주인아줌마는 기꺼이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식당이
텅, 텅, 비어 있던 어느날
나는 거기서 짠 국밥 한 그릇을
신김치와 콩나물무침으로 먹은 적이 있다

어쩌다 이렇게 조용한 주택가 길목에
이런 식당이 허술하게 문을 열고 있담,
생각하는 것이 상식, 그 상식을
보기좋게 뒤집으며 그 식당은 거기에 있는 셈인데……
한번은 세무서에서 나온 젊은 주사가
조용히 업종 전환을 권유한 바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식당 아줌마는 늘 준비해놓은 반찬 중에서
날짜를 못 이겨 상하기 직전인 것만으로
자신의 식사를 해결하곤 하는데,
그 처연한 혼자만의 식사를
그 앞을 지나다니며 무심히 몇번 보았다

삶이란 게 그런 것은 아닌가
쉬어빠지기 직전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느릿느릿 씹어대는, 어떤, 말로는 다 못할
무심함 같은, 그런 나날들의 이어짐……


/엄원태, 물방울 무덤 창비시선 272, 창비, 2007년 02월/


* tirol's thought

얼마 전 얘기했던대로 '한겨레21'에 '시 읽어주는 남자'라는 타이틀의 칼럼이 생긴 것을 보고 의욕을 내어 부지런히 시를 읽고 올려보려고 하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어떤 식으로든 계기를 찾아내고 결심을 하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 이 결심이 얼마나 갈지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오늘 고른 시는 어젯 밤에 읽은 엄원태 시인의 시다. 이 봄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처연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잠언투로 씌여진 마지막 연의 매력이 쉬이 가시지 않아서 골랐다. '쉬어빠지기 직전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혼자서 느릿느릿 씹어대는, 어떤, 말로는 다 못할/ 무심한 같은, 그런 나날들의 이어짐......' 정말 삶은 그런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덧붙여, 한마디.
시집의 24페이지부터 26페이지에 실려있는 이 시를 타이핑 하다가 꾀가 생겨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네이버의 한 블로그에 올려진 시가 있었다. 그래서 그걸 복사해서 붙이려고 보니, 어라, 몇구절이 조금 다르다. 좀더 살펴보니 이 시가 처음 발표된 것은 창작과 비평 1995년 겨울호였고 시집이 묶어져 나온 것은 올해 2월. 아마도 시인이 시집을 묶어내면서 퇴고를 한 게 아닌가 싶다. 두가지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니 확실히 시집에 실려있는 시가 조금 더 깔끔하고 낫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비교해서 읽어보시라.

* 다른 버전으로 읽어보기: 늦은 오후의 식당 / 엄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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