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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2004. 11. 9.
애수의 소야곡 - 진이정 애수의 소야곡 진이정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남인수와 고복수의 팬이던 아버지는 내 사춘기의 송창식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나는 또 누구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부턴 열린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이 순간까지도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그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즐기려고 애써 왔다 허나 당신을 이해할 것만 같은 밤이 자주 찾아오기에 나는 두렵다 나는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이해한다, 라고 똑 떨어지게 말할 날이 백발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추억이던 왜정 때의 카페와 나의 카페는 그 철자만이 일치할 뿐, 그러나 그런 중첩마저, 요즘의 내겐 소중히 여겨진다 아버지의 카바레와 나의 재즈 바는 그 무대만이 함께 휘황할 뿐 그러나 나는 사교춤을 출 줄 .. 2004. 11. 8.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이기철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 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 2004. 11. 5.
2004년 5월 - 10월에 읽은 책 1.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역, 로마인 이야기 12 : 위기로 치닫는 제국, 한길사,2004년 02월 2. 김훈, 현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4년 02월 3. KENSHI HIROKANE 저,한복진 등역, 한손에 잡히는 와인, 베스트홈(쿠켄),2001년 10월 4. 김준철, 와인 알고 마시면 두배로 즐겁다, 세종서적, 1999년 08월 5. 홍승우, 야야툰 : 비빔툰 에피소드 1, 문학과지성사, 2002년 12월 6. 김훈, 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시이야기, 푸른숲, 2004년 7월 7. 박종호,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시공사, 2004년 6월 8. 윤광준, 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세상 : 디카로 잘 찍은 사진 한 장, 웅진닷컴, 2004년 5월 9. 채승우,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 :.. 2004. 11. 4.
달의 눈물 - 함민복 달의 눈물 함민복 금호동 산동네의 밤이 깊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러 찾아드는 곳 힘들여 올라왔던 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숨찬 산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하수도 물소리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전봇대 굵기만한 도랑을 덮은 쇠철망 틈새로 들려오는 하수도 물소리 누가 때늦은 목욕을 했는지 제법 소리가 커지기도 하며 산동네의 삶처럼 경사가 져 썩은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쇠철망 앞에 쭈그려 .. 2004. 11. 3.
사향 - 김상옥 사향 김상옥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 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들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 tirol's thought 지난 31일. 시인의 아내가 죽자 시인은 곡기를 끊고 엿새만에 세상을 버렸다 한다. 몇해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서정주도 아내를 잃은 후 두달 동안 술만 마시다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오래도록 아내와 해로한 '노인'이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깊이 슬픔을 느끼는 '시인'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블로거의 말대로 '84세.. 2004.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