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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7

밤의 공벌레 - 이제니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2021. 1. 31.
사무원 - 김기택 사무원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損害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 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신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2020. 12. 13.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 이현승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이현승 밤의 도시를 바라볼 때처럼 명확해질 때는 없다. 어두운 천지에 저마다 연등을 달아놓듯 빛나는 자리마다 욕정이, 질투가, 허기가 있다. 이것보다 명확한 것이 있는가.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입술을 적시는 메마름과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탄식들. 일테면 심연에 가라앉아 느끼는 목마름. 구할 수 없는 것만을 기도하듯 간절함의 세목 또한 매번 불가능의 물목이다. 오늘은 내가 울고 내일은 네가 웃을 테지만 내일은 내가 웃고 네가 기도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울다 잠든 아이가 웃으며 잠꼬대를 할 때, 배 속은 텅 빈 냉장고 불빛처럼 허기지고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게 구부러지는 기도처럼, 빛이 휜다. *.. 2020. 7. 25.
밤길 - 최하림 밤길 최하림 한 날이 저무는 저녁답에 갈가마귀 울음소리 드높아가고 낮의 푸르름과 밤의 깊음이 가야 할 길을 마련하는데 바다의 폭풍으로도 오막살이 지청구로도 발길이 향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자를 은신하며 술집으로 술집으로 돌면서 잔을 들고 있다 식은 가슴을 태우고 말을 태우는 잔 불길같은 사나이들이 마시는 잔 잔이여 우리들은 무엇으로 길잡이를 삼아야 하는가 온밤을 헤매 이른 우이동 골짝의 바람소리인가 산허리에 등을 붙이고 산 헐벗은 이웃들의 울음인가 연민으로 새끼들을 등을 업고 아내를 끌어안아도 한날의 푸르름과 깊음은 드러나지 않고 도봉산의 갈멧빛도 물들어지지 않는다 쓸쓸한 갈가마귀 울음소리 드높아갈 뿐이다 tirol’s thought ‘잔이여 우리들은 무엇으로 길잡이를 삼아야 하는가’라는 구절을 오래 .. 2020. 2. 23.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 전동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전동균 산밭에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저마다의 겨울을 품고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저희는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당신이 없는 곳에서당신과 함께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 tirol's thouht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 첫눈은 내렸다고 해야할지 아니라고 해야할지 고민이 되지만'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계절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듯 합니다.한 계절이 가고 다른 계절이 오고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중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것 같은데,'개체의 발생은 종의 발생을.. 2019. 12. 15.
두부 - 고영민 두부 고영민 저녁은 어디에서 오나 두부가 엉기듯 갓 만든 저녁은 살이 부드럽고 아직 따뜻하고 종일 불려놓은 시간을 맷돌에 곱게 갈아 끓여 베보자기에 걸러 짠 살며시 누름돌을 올려놓은 이 초저녁은 순두부처럼 후룩후룩 웃물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좋을 듯한데 저녁이 오는 것은 두부가 오는 것 오늘도 어스름 녘 딸랑딸랑 두부장수 종소리가 들리고 두부를 사러 가는 소년이 있고 두붓집 주인이 커다란 손으로 찬물에 담가둔 두부 한모를 건져 검은 봉지에 담아주면 저녁이 오는 것 두부가 오는 것 * tirol's thought 갓 만든 두부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시다. '저녁, 소년, 두부장수...', 이런 말들 때문인지 김종삼 시인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는, '저녁'이라는 이미지에 무의식적으로 .. 2019.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