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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저녁의 우울 - 장석남

by tirol 2006. 9. 7.
저녁의 우울

장석남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청둥오리도 몇 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었다
내가 너댓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 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 하겠다는 뜻일까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 시인선 112), 문학과지성사, 1999년 09월/

* tirol's thought

강남의 한 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찬 보도를 걷는다.
이 아득하고 어지럽고 심란한 점심의 우울에 비하면
저녁 강변의 우울은 따뜻해 보인다.

그저께 저녁인가,
아내가 지하철 선반에 올려두었다가 깜빡하고 놓고 내렸다던
옥수수들의 행방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누군가 가져가서 삶아 먹었을까?
버려지진 않았을까?

나를 이곳에 올려놓은 이는 누구인가?
깜빡 나를 잊고 가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어디로, 어디까지 가게 될까?
아무 의미없이 그냥 사라지게 되고 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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