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10월 - 기형도

by tirol 2006. 10. 10.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080, 문학과지성사, 2000년 06월/


* tirol's thought

잠을 많이 자는 편인데도 늘 피곤하다.
꿈속에서 나는 늘 누군가와 싸운다.
언제부터 시작된 싸움인지는 알 수 없다.
내 젊은 날에 나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잠시 궁금해지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도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 절망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랬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희망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늘 밤 꿈속에서도 분명 맞닥뜨리게 될 싸움뿐이다.
오늘은 어제와 이어져 있는 것이니
내 꿈 속의 싸움은 젊은 날의 어디쯤과 이어져 있을 것이다.
내 싸움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