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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 이기철

by tirol 2006. 9. 21.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이기철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이기철 시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민음사/

* tirol's thought

지난 몇 달은 힘들었다, 위기라고 느낄만큼.
이렇게 써놓고 나니 지금은 그 위기가 지난 간 듯 들리지만
사실은 그 고통은 점점 더해만 간다.
밤새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있는 소나무가 된 기분이다.
가지가 부러지지는 않을까 (차라리 부러져 버리면 속이 편할까?)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든다.
하지만 부러지면 안된다는 것,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내게 힘든 환경을 허락하신 그분의 뜻이 뭘까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이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생각해보거나
내게 벌어질 수 있는 더 나쁜 일들을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내게 닥친 일들을 견뎌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꽃이 피든 안피든
살아야 한다, 건너가야 한다.
그게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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