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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by tirol 2006. 9. 10.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 tirol's thought

오늘 내 몸에 들어온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교회를 다녀와서 한시간 반쯤 TV를 보고 책을 읽다가
한강변을 한시간 조금 넘게 걸어다녔다.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때 뭔가 들어온 것 같기도 한데 역시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아내는 일때문에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온다고 해서
집에 와서 혼자 밥을 먹으며 소주를 한 병 마셨다.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대는 그 작고 하찮은 것때문에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 소주를 마셨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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