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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저 물결 하나 - 나희덕

by tirol 2018. 12. 20.

저 물결 하나


나희덕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일으켜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사랑도 물결, 처럼

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

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

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

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

같은 자리로 내려앉는 법이 없는

저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

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넨다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



tirol's thought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남산이나 북악스카이웨이 같은 곳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 

'서울에 저렇게 집이 많은데, 우리집은...'

이사다니는 건 힘들다.

아내가 아끼는 가구의 모퉁이가 부서지고,

오디오 케이블이 사라지고,

그때 그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열어봐야 한다.

하긴 써놓고 보니 이런 어려움을 어려움이라고 말해야 할지 머뭇거리게 된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이사를 다닌 

시인의 숨겨진 이야기에 비춰보면 이쯤의 불편이 무슨 대수랴.

오래 전,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이사를 하면서 

어머니가 느꼈을 고단함이 떠올라 마음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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