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이희중
한 쉰 해를 살아보니 이제 알겠다,
내가 나이를 먹는 게 아니고
세월이 나를 둔 채 지나간다는 것.
거울을 보지 않으면
거울을 대신하는 무엇을 이용하지 않으면
남들이 보는 내 모습을 나는 모를 수 있고
잊을 수 있고 멀리할 수 있고,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으로 보는 내 모습은
백번 양보해도, 아직 삼십대.
그래서 나는 가끔, 아주 가끔
한때 사랑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문득 떠오르거나
그 사진을 보게 되거나
같은 자리에 그와 잠시 있게 되면,
태곳적 그를 가장 아끼던 순간의 기분이 되어
가슴이 나부끼면서,
그를 붙잡고 또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오래 하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 거리가 생기면
그와는 더 나아가지 못한 서사,
그와 같이 살고, 오래 거듭 잠자리를 같이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그렇게 살아낸
다른 오늘은 어떠할까를 한꺼번에 생각하려 한다.
그때 내 영혼은 바야흐로
거울을 무찌르고 시간을 뭉개고 있는 것.
오늘 그의 부고가 내게 왔다.
그와 내가 못 이룬 한 생애와 그 일상 낱낱이
한목에 내 눈앞에 밀려와
잠시 머물다가,
아직은 내가 알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간다.
<이희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문학동네, 2017>
tirol's thought
서른을 앞둔 그 해의 기분이 이러했던가
마흔은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는데
쉰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초겨울의 기분은 복잡미묘하다.
그러니 시집을 읽어도 눈에 걸리는 게 이런 시.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으로 보는 내 모습은/ 백번 양보해도, 아직 삼십대."
어제는 오랫만에 대학 선후배들을 만났다.
모두들 반가워하며 서로를 붙잡고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오래 하고 싶어"했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문득 떠올랐거나
태곳적 어떤 순간의 기분이 되어
가슴이 나부꼈기 때문이었을까.
추억과 회한과 그리움은
"한목에" 밀려와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간다.
"아직은 내가 알지 못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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