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 지성사, 2003>
* tirol's thought
회의를 하다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맞을까?'
같은 단어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 자기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사전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오해로 가득한 대화들.
시인이 알려주는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기이하지만 아름답다.
업무회의용으로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먼 곳으로 보낼 편지를 쓰는 누군가에게는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전의 수정/증보판이 나오려나?
내가 직접 사전을 만들어보는 게 나을까?
표제어는 몇개 정도가 적절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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