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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 정호승

by tirol 2022. 8. 10.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 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 봐 두려워라

tirol's thought

분명 강아지는 먼저 나를 용서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당한 일을 기억하고 분을 품겠지만
강아지는 그런 일을 당하고도 다시 내 앞에 와서 꼬리를 흔든다
그게 용서가 아니라 망각 때문이라도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째서 강아지만큼도 잊지 못하는가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는가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중3 아들 녀석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를 운운할 수 있을까
강아지보다 먼저 의자 밑으로 들어가 숨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