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면 길이
이성복
밤이 오면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그대여 머뭇거리지 마라
물결 위에 뜨는 죽은 아이처럼
우리는 어머니 눈길 위에 떠 있고,
이제 막 날개 펴는 괴로움 하나도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대여 지나가는 낯선 새들이 오면
그대 가슴속 더운 곳에 눕혀라
그대 괴로움이 그대 뜻이 아니듯이
그들은 너무 먼 곳에서 왔다
바람 부는 날 유도화의 잦은 떨림처럼
순한 날들이 오기까지,
그대여 밤이 오는 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보아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이성복,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tirol's thought
지난 일요일 저녁, 외출했다가 집에 오는 길에 라디오를 들었는데
'저녁'에 관련된 시 네 편을 읽어주는 코너가 있었다.
김종삼, 정끝별, 채호기, 그리고 이성복 시인의 시였다.
다른 시들은 다 읽어본 기억이 나는데, 이 시만 유독 기억이 흐릿해서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시를 찾아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시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아, 닿을 수 없는 것은 더욱 간절하게 느껴지는 법.
결국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게시판에 문의를 남겨서
오늘 아침에 제목을 알고 시를 찾게 되었다.
이성복 시집 '남해금산'에 있는 시였다.
'남해금산'은 꽤 여러번 읽었는데
눈으로 읽을 때와 귀로 들을 때의 시는 느낌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밤이 오면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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