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그는 - 정호승

by tirol 2004. 12. 21.
그는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tirol's thought

흐르는 시간을 따라 시에 대한 취향도 바뀌는 것 같다.
정호승의 시를 예로 들자면
한참 그의 시를 좋아하던 시절에 비해 관심의 정도가 수십 계단 쯤 추락한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시인 목록에서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더 시간이 흐르고 내 취향이 또 바뀌어서 다시 수십 계단 쯤 위쪽으로 옮겨갈지도 모르지.

나는 이 시의 '그'를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로 읽는다.
대학시절 교회를 나가지 않다가 다시 교회를 나가면서 깨닫게 된 나의 하나님.
'괜찮다, 괜찮다'라고 내 어깨를 두드려주시는 분.
내가 잘 나서도 아니고, 내가 뭔가를 해냈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주시는 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그분.

당신은 '그'를 누구로 읽으시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