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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 김기택

by tirol 2004. 11. 17.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자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 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중년의 얼굴에서 뛰어나왔다.

작고 어린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레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들이 나왔구나
오랜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30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더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문학과 사회」2000년 겨울호 에서

Tracked from http://blog.naver.com/123jina/3652931

* tirol's thought

흘러간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여섯 살의 나, 스무 살의 나는 어디로 갔는가.
시인의 말대로
사람의 시간은 나이테처럼
첩첩이 오늘의 얼굴 뒤에 쌓이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반가운 옛날을 만나면
어느날 불쑥 뛰어나오기도 하고 그러는 게 아닐까.
확실하진 않지만 나도 어렴풋이 내 안에 숨어있는
여섯살의 나, 스무살의 내가 느껴지기도 하니까.

ps.
이 시를 읽다가 옛날에 찍은 사진이 하나 생각나서 아래에 붙여둔다.



[2002.12.29. 수원에서]

오랫만에 친구들이 모였다.
종인이 녀석이 제 딸을 업고 저만치 걸어간다.
그래
너도 아버지였지.
흘러온 세월이 네 등에 머리를 대고
따뜻한 숨을 내쉬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