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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정기구독 목록 - 최갑수

by tirol 2004. 11. 10.
정기구독 목록

최갑수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들어버린
제라늄 화분 저물 무렵 혼자서 끓여 먹는
삼양라면 다시 필까, 물을 줘보기도 하지만
소식이 없는 제라늄 화분 시들었구나,
식은 밤을 말다 말고 나는

이렇듯 내 가난한 정기구독 목록에는
가난하고도 외로운 이름 몇 개와
붉은 줄이 그어진
희망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연체된 고지서의 커다란 글자들

* tirol's thought
1.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모아놓으면 어렴풋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들.
나의 도서목록이나 내가 골라내는 시들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2.
시의 하단부에
'식은 밤을 말다 말고 나는' 이라는 부분이
'식은 밥을 말다 말고 나는' 의 오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식은 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두기로 한다.
나중에 시인의 시집을 사게 되면 확인해 보리라.

3.
나의 '정기구독 목록'엔 어떤 것들이 있나.
시인의 목록과 겹치는 것도 눈에 띈다.
가령,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이번 가을엔 아직 배달이 안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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