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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 박정대

by tirol 2004. 11. 19.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현대시』2003년 6월호

Tracked from http://blog.naver.com/kmh3833/120008034166

* tirol's thought

시인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져서 '옥탑 위의 빤스'를 떠올리고
나는 주소록을 정리하다가 문득 서러워진다.
아득한 이름들, '내가 외상졌던 세월'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옥타비오 빠스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1990년도 라던가?
그 무렵, 학교 앞 어느 찻집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길 건너 옥상에서 바람에 날리는 흰 빨래를 보며 말했다.오늘은 빨래가 참 잘 마르겠어요.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여자.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