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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서울 사는 친구에게 - 안도현

by tirol 2004. 12. 9.
서울 사는 친구에게

안도현


세상 속으로 뜨거운 가을이 오고 있네
나뭇잎들 붉어지며 떨어뜨려야 할 이파리들 떨어드리는 걸 보니
자연은 늘 혁명도 잘하는구나 싶네
풍문으로 요즈음 희망이 자네 편이 아니라는 소식 자주 접하네
되는 일도 되지 않는 일도 없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싶거든, 이리로 한 번 내려오게
기왕이면 호남선 통일호 열차를 타고 찐계란 몇 개
소금 찍어 먹으면서 주간지라도 뒤적거리며 오게
금주의 운세에다 마음을 기대보는 것도 괜찮겠고,
광주까지 가는 이를 만나거든 망월동 가는 길을 물어봐도 좋겠지
밤 깊어 도착했으면 하네, 이리역 광장에서 맥주부터 한 잔 하고
나는 자네가 취하도록 술을 사고 싶네
삶보다 앞서가는 논리도 같이 데리고 오게
꿈으로는 말고 현실로 와서 걸판지게 한 잔 먹세
어깨를 잠시 꽃게처럼 내리고, 순대국이 끓는
중앙시장 정순집으로 기어들 수도 있고, 레테라는 집도 좋지
밤 12시가 넘으면 포장마차 로진으로 가 꼼장어를 굽지
해직교사가 무슨 돈으로 술타령이냐 묻고 싶겠지만
없으면 외상이라도 하지, 외상술 마실 곳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날이 새면 우리 김제 만경 들녘 보러 가세
지평선이 이마를 치는 곳이라네, 자네는 알고 있겠지
들판이야말로 완성된 민주대연합이 아니던가
갑자기 자네는 부담스러워질지 모르겠네, 이름이야 까짓껏
개똥이면 어떻고 쇠똥이면 어떻겠는가
가을이 가기 전에 꼭 오기만 하게


* tirol's thought

평촌 사는 친구 M과 술마신지가 꽤 된 것 같다. 사실 느낌이 그렇다는거지 실제로 따져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닐 것이다. 일년 내내 얼굴 한번 못보고 지내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녀석과 나는 가끔 별 이유없이 만나서 별 말없이 술을 마시고 헤어진다. 만나면 어제도 만나서 같이 술을 마셨던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헤어질 땐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 술을 마실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서울로 인사발령이 나기전까지 녀석은 청주에 살았다. 그때도 우린 가끔씩 만나 술을 마셨다. 내가 청주에 가기도 하고 녀석이 서울에 오기도 했다. 별 재미없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터벅거리며 집에 가다가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얌마, 얼렁 서울로 이사와라."라고 건주정을 부리거나, 다른 친구녀석들과 늦은 밤까지 술을 먹다가 "야, 지금 택시타고 서울 와라. 택시비 줄께. 어 잠깐만, P 바꿔줄께"하고 돌아가며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술마시는 빈도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중요한 건 몸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다. 머리로 따지자면 시간 내기 힘든 12월이지만, 해가 다 가기 전에 만나서 녀석과 술한잔 하리라.
어깨를 잠시 꽃게처럼 내리고, 순대국이 끓는 시장통의 선술집으로 기어드는 것도 좋고, 밤 12시가 넘은 포장마차도 좋고. 장소야 까짓껏 개똥이면 어떻고 쇠똥이면 어떻겠는가. 이 해가 가기전에 꼭 한잔 마시기만 하세, 친구.


p.s

며칠 전 올린 김혜순의 시도 그렇고 오늘 올리는 안도현의 이 시도 그렇고, 예전에 올려두었던 시들을 가져다 다시 올리고 있다. 짤막하게라도 코멘트를 달아두었던 것들은 말고 그냥 덜렁 시만 올려놓았던 것들에 내 얘기를 붙이고 싶어서다. 인터넷의 바다에 주인없이 떠다니는 시들은 많고도 많다. 어줍잖은 욕심일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읽은, 내가 좋아하는 시들에 조그맣게 표딱지를 붙여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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