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서울의 예수 - 정호승

by tirol 2004. 12. 6.
서울의 예수


정호승


1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 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가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랑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을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등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 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고 어둠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 tirol's thought

대학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시집을 선물했었다. 일부러 사서 준 경우보다는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던 시집을 꺼내 '..에게'라고 써서 건네준 경우가 많았다. 내가 쓴 시도 아니면서, 마치 내 시집에 싸인을 해주듯이 그렇게.
지난 주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5년만에 문학박사가 되어 돌아온 K를 만났다. 우리는 대학시절 내내 가깝게 어울려 지냈다. 대입학력고사를 보러 서울에 올라와 묵었던 평화 여인숙에서 만나서 졸업할 때까지. 그때가 1988년 12월 이었으니까 벌써 얼마나 세월이 흐른건가.
아침에 이 시를 읽다보니 어느 겨울 K에게 주었던 시집 생각이 났다. 이 시가 실려있는 정호승의 '서울 예수'. 민음사에서 나온 곤색 표지의 그 시집.
졸업 후 가끔 K를 만날 때마다 술을 마시며 주억거리던 말,
"그 후로 모든 것이 것이 변했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난 왜 그렇게 정호승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어찌하여 이제 더이상 정호승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지.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일들은 해가 갈 수록 늘어 간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사는 친구에게 - 안도현  (2) 2004.12.09
나의 시의 발전사 - 김혜순  (0) 2004.12.07
소풍 - 나희덕  (0) 2004.12.03
우체통 - 이진명  (0) 2004.12.02
담장이 넝쿨 - 권대웅  (1) 200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