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우체통 - 이진명

by tirol 2004. 12. 2.
우체통

이진명


나는 정류소 팻말 아래 진종일 서 있거나
잎새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아래 계절이 다 가도록 서 있곤 했다
가끔 네거리 지하도 입구에 벌거벗은 채 있기도 했고
공중전화 유리상자 곁에 멀뚱히 붙어 있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의 앉은키 만큼밖에 크지 못했으며
검붉은 살색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온몸을 받쳐대고는 있었지만
몸통 속에는 사실 빈 어둠일 때가 많았다
그 어둠을 한번 휘이 저어 보라
견딜 수 없는 공포가 손을 해면처럼 잡아늘일 것이다
캄캄한 채 나는 항상 열려 있었다
지하도 계단에 이마를 박고 온통 구부린 사내의 치켜든 새까만 두 손바닥처럼
또 건너편 지하도 계단에서
갓난 것을 끌어안고 누더기 수건을 뒤집어쓴 여자의 무릎 앞 플라스틱 동전 바구니처럼
넣어다오, 살짝 가볍게
넣어다오, 깊고 은밀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내 어둠의 바닥에 떨어져 닿는 너희들의 탄식소리
나는 새까만 두 손바닥을 펼쳐 올리거나
동전바구니를 거느리지는 않았지만
안에서는 열릴 수 없는 외짝 입을 달고
거리거리마다 붙박혀 있곤 했다
적어 보내줘 적어 보내줘
본지역 기타지역 그 어디일지라도
때묻은 종이 꽃잎 위 너희 아까운 인장 찍으며, 그럼
死海에서 푸른 잎줄기를 물고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
그러나 나는 몸통 속 빈 어둠을 물리치려고
거지가 되기도 하고 외설이 되기도 했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Tracked from http://www.poemfire.com

* tirol's thought

오는 크리스마스엔 직접 손으로 쓴 카드를 몇군데 보내볼까 한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난다.
우리 동네 어디쯤에 우체통이 있었던가.
정류소 팻말 아래
잎새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아래
네거리 지하도 입구
공중전화 유리상자 곁

을 유심히 찾아보면 한두개쯤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 그런데 내가 이메일 주소말고 진짜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지?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예수 - 정호승  (1) 2004.12.06
소풍 - 나희덕  (0) 2004.12.03
담장이 넝쿨 - 권대웅  (1) 2004.12.01
사무원 - 김기택  (2) 2004.11.30
눈 - 김명인  (1) 200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