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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서른하나 - 신동호

by tirol 2001. 9. 16.
서른하나

신동호


고맙다 세월이여
가로수 위로 노을이 내려앉아 귀가의 저녁에 너의 얼굴을 만나면
배냇저고리, 색이 바랜 무명은 고통과 더불어 어머니의 장롱 어딘가에 묻혀있고
장롱, 다섯번의 이사와 궁색한 가계를 지켜본 귀퉁이의 자개조각
붙어 있는 그만큼 네가 고맙다

스물이던 시절부터 가능하던 나의 아이여
저물 무렵의 골목은 길어져가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 둘 스물하나 스물둘 세월마다 켜켜이 쌓인 그리운 이여,
노을이 지면 그림자 사라지고 길은 짧아질까 그럴수록 천천히 걸어볼 일이었을까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준 나날이여

한때나마 원망도 있었다
서른의 구비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결과로 취급되었으므로
가정과 안정을 추구하는 청춘의 꾀죄죄함이여
생각해보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이미 나올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결과, 결과 또한 필연으로 가는 우연이 된다면
세월아 또다시 집 밖으로 열린 세월아
서른하나는 시작이었다

문학동네 시집13 신동호 시집 "저물무렵"/

* tirol's thought

서른하나. "1996.9.12.奎."라고 적혀있다. 스물일곱에 읽은시다. 아마도 그때 난 내가 서른하나가 되면 어떤 시를 쓰게 될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시를 쓰게 될까? 조금은 쓸쓸하지만, 청춘의 꾀죄죄함을 슬퍼하지만, 열린 세월을 두고 '서른하나는 시작이었다'라고 말하게 될까?" 서른 하나가 된 지금 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내게는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준 나날들"도 없다. 오직 나 혼자다. 스물 일곱, 그 시절에도, 그리고 서른하나 지금도. 그대로다.
하지만 내 친구들에게, 올해로 서른하나가 된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읽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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