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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가정 - 박목월

by tirol 2001. 9. 16.
家庭

박목월


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詩人의 家庭에는
알 電燈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地上
연민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地上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한국현대시문학대계 18, 박목월 시집. 지식산업사/

*tirol's thought

중학교 다닐 때 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르면서도 그냥 '청록파' 시인들이 좋았다. 그 중에서 조지훈을 제일 좋아했고 그 다음이 박목월이었다. 박목월의 '나그네'에 대한 답시로 조지훈이 '완화삼'을 썼다는 참고서의 해설을 읽으며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 나는 그들의 시를 좀처럼 읽지 않았다. 창비나 문지사에서 나오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찾아읽기에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왠지 그들의 시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입학해서 다시 박목월의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나를 눈물짓게 했던 시. 늘 내 마음에 빈자리로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시. 그리고 언젠가의 나를 비춰주는 시. 촌스러운 제목만큼이나 촌스럽게 나를 아득하게 하는 시. 우리 아버지는 몇문의 신발을 신으셨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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