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이제 가야만 한다 - 최승자

by tirol 2001. 9. 16.
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을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78,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

* tirol's thought

그래 모두 맞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 하고" 나역시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하지만, 난 아직도 뒤뚱거리고 있는 중, 허덕이고 있는 중 ...중...중...중... 끝없는 현재 진행형... "이제는 가야한다"고,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고" 비감하게 말할 자신도 없는, 나. 이 시는 허풍이다. 허영이다. 난 뒤뚱거리던 시인이 어떻게 균형을 잡고,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없다. 나를 납득시켜다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른하나 - 신동호  (0) 2001.09.16
가정 - 박목월  (0) 2001.09.16
전염병동에서 - 김혜순  (0) 2001.09.16
방죽 위에 서서 - 김갑수  (0) 2001.09.16
절망 - 김수영  (0) 2001.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