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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밥그릇 - 정호승

by tirol 2004. 10. 21.
밥그릇

정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잇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tirol's thought

어쩌면 내가 하는 고민이란게 허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밥그릇을 핥아보지 않고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지 않고
다른 밥 그릇을 기웃거리거나 저 너머 화단에 핀 꽃이 맛있어보인다고 중얼거리는.

빈 밥그릇을 핥고 또 핥는 개의 모습에서
치열하지 못한 자신의 생을 반성하는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
개는 자신이 핥고 또 핥는 밥 그릇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 밥그릇이 세상의 전부이자 기준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인간의 혓바닥은 개의 혓바닥보다 얼마나 순수하지 못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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