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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밤길 - 최하림

by tirol 2020. 2. 23.

밤길

최하림

한 날이 저무는 저녁답에
갈가마귀 울음소리 드높아가고
낮의 푸르름과 밤의 깊음이
가야 할 길을 마련하는데
바다의 폭풍으로도 오막살이 지청구로도
발길이 향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자를 은신하며
술집으로 술집으로 돌면서
잔을 들고 있다 식은 가슴을
태우고 말을 태우는 잔
불길같은 사나이들이 마시는 잔
잔이여 우리들은 무엇으로 길잡이를 삼아야 하는가
온밤을 헤매 이른 우이동 골짝의 바람소리인가
산허리에 등을 붙이고 산 헐벗은 이웃들의 울음인가
연민으로 새끼들을 등을 업고 아내를 끌어안아도
한날의 푸르름과 깊음은 드러나지 않고
도봉산의 갈멧빛도 물들어지지 않는다
쓸쓸한 갈가마귀 울음소리 드높아갈 뿐이다

<최하림,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사, 1976>

tirol’s thought
‘잔이여 우리들은 무엇으로 길잡이를 삼아야 하는가’라는 구절을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시다.
시가 씌어진 1975년은 유신 체제가 이어지던 시기.
술마시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소리소문도 없이 잡혀가던 그 때에 비해 오늘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런데 오늘 우리의 길잡이는 무엇인가
잔에게 길잡이를 묻던 그들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앞으로 더 나아갔는가
각자도생의 길로 뿔뿔히 흩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길잡이를 고민하던 마음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쓸쓸한 갈가마귀 울음소리’만 여전히 드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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