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쓰다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심재휘,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최측의 농간, 2017>
tirol's thought
비는 언젠가는 올 것인데
비가 오지 않는 동안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지 않은 여러 날들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것들이 말라버렸다
간밤에 얼핏 빗소리를 들었다
세상이 마르기 전의 날들이
꿈 속의 빗소리처럼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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