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우산을 쓰다 - 심재휘

by tirol 2020. 6. 14.

우산을 쓰다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심재휘,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최측의 농간, 2017>

 

 

tirol's thought

 

비는 언젠가는 올 것인데

비가 오지 않는 동안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지 않은 여러 날들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것들이 말라버렸다 

간밤에 얼핏 빗소리를 들었다

세상이 마르기 전의 날들이 

꿈 속의 빗소리처럼 아득하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밀국수 - 박준  (0) 2020.06.27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0) 2020.06.21
정지의 힘 - 백무산  (7) 2020.06.07
밤길 - 최하림  (0) 2020.02.23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 전동균  (0) 2019.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