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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마음의 서랍 - 강연호

by tirol 2006. 8. 19.
마음의 서랍

강연호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절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현대시학 2004년 5월호, 현대시동인상 당선작/


* tirol's thought

지난 한 주간 휴가를 냈었다.
오늘은 휴가를 내지 않아도 원래 쉬는 토요일이니까 휴가는 끝난 셈이다.
이번 휴가 동안에 꼭 해야겠다고 맘 먹었던 일들 중의 하나가
'마음의 서랍'을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시인처럼 나도 '끝내 열어보지 못했다.'

심리학 책들을 보면
오늘의 내가 가진 문제들 중에 많은 부분은
바로 '마음의 서랍'에 갖힌 '아픈 기억들' 때문이라는데,
그래서 그것들을 서랍 밖으로 꺼내어
찬찬히 그리고 똑바로 들여다 보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된다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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