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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비누에 대하여 - 이영광

by tirol 2006. 8. 22.
비누에 대하여

이영광


비누칠을 하다 보면
함부로 움켜쥐고 으스러뜨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누는 조그맣고 부드러워
한손에 잡히지만
아귀힘을 빠져나가면서
부서지지 않으면서
더러워진 나의 몸을 씻어준다
샤워를 하면서 생각한다
힘을 주면 더욱 미끄러워져
나를 벗어나는 그대
나는 그대를 움켜쥐려 했고
그대는 조심조심 나를 벗어났지
그대 잃은 슬픔 깨닫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지
끝내 으스러지지 않고
천천히 닳아 없어지는 비누처럼, 강인하게
한번도 나의 소유가 된 적 없는데
내 곁에 늘 있는 그대
나를 깊이 사랑해주는
미끌미끌한 그대

/이영광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창작과비평사, 2003/


* tirol's thought

사람들이 '함부로 움켜쥐고 으스러뜨릴 수 있는 것은/세상에 없다'는 것만 깨달아도 세상은 좀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깨닫든 말든 '천천히 닳아 없어지는 비누처럼' 흘러가는 세월, 낡아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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