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근심을 주신 하느님께 - 김승희

by tirol 2006. 8. 8.
근심을 주신 하느님께

김승희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하늘은 넓고 갈 길은 막막한데
이토록 자잘한 근심들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아침을 시작하여
무엇으로 밤을 마감할 수 있을까요
근심이야말로 분명한 행선지
삶의 공허 앞에 비석처럼 세워진
확실하고도 고마운 하나씩의 이정표

세상은 광막하고 시대는 혼란스러온데
나에겐 자잘한 근심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취직걱정 건강걱정 자식걱정에 반찬걱정
주택부금 상호부금 월부책값에 세금걱정
연탄가스 주의보와 동파된 하수구 걱정,
시어머님 생활비와 친정아버지의 병원비와

이 조그만 근심들이 있어서
난 우주가 막막하게 텅빈 낯선 것이 아니고
쌀독처럼 친숙한 것이며,
밑도 끝도 없는 적막강산이 아니라
한없이 체온으로 정든
내 헌옷 샅은 생각이 들어요,
근심이야말로 정다운 여인숙
그것조차 없다면 삶은 정말 매달릴
것이 없는 백골산의 단애와 같아요

작고 미소한 근심들이여
너는 위대합니다,
너야말로 나를 삶에 꼭 매달리게 하는
지푸라기며,
허무의 양손이 우리 상처의 아가리를 끔찍하고도 냉혹하게
옆으로 찢어벌려
그 속으로 죽음 같은 극약을 부어넣으려고 할 때
넌 작지만 완강한 손끝으로
상처의 벌어진 틈을 재빨리 오무려주는
전천후의 자동단추와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린 잽싸게 그 싶은 허무 속의
막막한 무서움을 잊어버리고
일심으로 근심에만 집착하면서
다시 살 길을 재촉합니다,
25시도 지난 지금
우리는 갈 곳도 없는데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을 잊어버리도록
더 많고 자잘한 근심들을 주소서,
길 없는 길을 가기 위하여
문 없는 문을 열기 위하여


* tirol's thought

한동안 시를 읽지 못했다.
어쩌다 읽어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이런 사랑 얘기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가,
어떤 시는 너무 모호했고 또 어떤 시는 너무 명백했으며,
어떤 시는 너무 자질구레했고 또 어떤 시는 너무 거창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어쩌다가.
글을 한동안 올리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마음에 닿지 않는 시에 억지로 내 생각이나 느낌을 쥐어짜서
숙제처럼 올릴 필요는 없으니까,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래도 읽어야한다, 써야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다 또 시집을 들척거리고, 시가 있는 싸이트를 찾아 마우스를 딸깍거린다.
오늘 찾아낸 이 시도 처음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애매했다.
진짜 감사로 읽어야 할지, 자조로 읽어야 할지.
결국 양쪽으로 읽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애매하게.
사람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쓰지 않으면 굳는다.
시를 읽는 마음,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
많고 많은 자잘한 근심들 때문에 이 막막한 세상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것들 때문에, 그것들에만 눈과 마음이 팔려서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을 잊고 살아가서는 안될텐데...
어쩌다가...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타 - 신경림  (3) 2006.08.18
열대야 - 나희덕  (2) 2006.08.17
기러기 - 이면우  (1) 2006.07.11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 Robert Frost  (0) 2006.07.06
돌멩이 하나 - 김남주  (0) 200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