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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눈먼 무사 - 박정대

by tirol 2005. 12. 28.
눈먼 무사

박정대


눈멀어 나 이제사 고향에 돌아왔네

아픈 몸 좀 눕히고 잃어버린 풍경의 시력 회복하러 시골에 있는 누님댁에 내려와 며칠을 골방에서 뒹구네
그러나 고향은 고향이되 더 이상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이제 나 몸도 마음도 쉽게 쉬지를 못하네

시골 농협에서 나누어준 달력을 치어다보며 가까스로 일주일을 버티네, 내가 살았던 옛 마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농협 달력,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자전거를 타고 달력 속으로 난 길을 달리네

내려올 때 가져온 백석과 이용악의 시집, 가끔은 또 그 낡은 너와집에 들어가 서너 시간 아무 말 없이 뒹굴기도 하네

겨울바람이 문풍지를 싸아하게 두드리고 가는 거, 그게 음악이지 生은 눈을 감고서라도 필사적으로 귀향하는 거, 그게 바로 시지

그런 생각할 때면 내 가슴에서 포르릉 날아간 멧새들의 소리 다시 들려오기도 했네, 명치끝에서 고드름처럼 다시 자라나기도 했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시골 골방에 누워 있다가 봉창 여는 재미 아시는지

내 안의 날숨과 들숨이 세상을 향해 뚫어놓은 작은 통로, 맑고 차가운 숨결들이 누 떼처럼 넘나드는 저 벅찬 통로, 날것들이 생생하게 드나드는 저 生의 경계선

(니북에서는 방송 채널을 통로라고 한다지?
형광등 꼬마전구를 씨불알이라고 한다지?)

씨불알 저게 바로 生이지, 시골에 내려와 어느 방송 통로에선가 아프리카 누 떼가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네, 거친 물살을 가로지르는 저 필사적인 生의 이동, 그게 바로 음악이고 귀향이지

生은 두 눈 부릅뜨고 귀향하는 것
아니 生은 눈을 감고서라도 필사적으로 귀향하는 것

고향에 내려와 바람의 음악 소리 들으며 나 조금씩 고향을 회복하네
눈 쌓인 산과 벌판이 나에겐 그 어떤 진통제보다도 강력한 위안

눈멀어 내려온 고향에서 눈감으면 이제사 조금씩 복사꽃 핀 마을 보이네
복사꽃 사이로 날아다니던 호랑이들. 그 옛날의 무사들 보이네

노래보다 먼저, 시보다 먼저 본질적인 사랑이 눈을 밝게 하네, 그러한 곳에 이제사 나 눈감고 가까스로 당도한 것인데

사랑보다 먼저 사랑에 눈먼 나보다 먼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녀, 깊은 밤 봉창문을 통해 은은한 숨결을 보내오는 그녀

달빛만 저 홀로 위영청 밝은 밤

그러나 여전히 눈감고 골똘히 귀향하고 있는 눈먼 무사, 반가사유로 아득히 깊어가는, 눈이라도 펑펑 내릴 것 같은 칠흑의 밤


* tirol's thought

이번 달 들어 세번째로 아프리카 누 이야기를 보거나 듣는다. 한번은 회사 리더십 교육에서 또 한번은 교회 주일 설교 시간에 그리고 박정대의 시 속에서.
정말 우연히도 내가 이전까지는 누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 들었으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본다. 어느 쪽이든 앞으로 나는 누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겠지.
그 중에서 누의 이야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로 기억될 한마디,

生은 두 눈 부릅뜨고 귀향하는 것
아니 生은 눈을 감고서라도 필사적으로 귀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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