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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 이문재

by tirol 2011. 4. 28.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이문재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 이문재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문학동네, 2001)
** 출처: http://goo.gl/m1Gvd

* tirol's thought

비 갠 푸른 아침 하늘, 환하게 비치는 햇살을 맞으며
이 시를 떠올렸다.
본문 내용은 어렴풋했지만
제목만큼은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와 찾아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시 제목이 아니라 시집의 제목이었다.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시집 제목은 '구두 벗어'라고 되어 있고
표제시인 이 시의 제목은 '구두를' 이라고 되어 있다.
(시인이 왜 그렇게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시의 분위기도 생각했던 것보다 어둡다.
어제와 그제 비오는 거리를 걸으며
밑창 갈라진 구두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어느순간 갑자기
우리를 적시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젖은 발바닥은 쉽사리 마르지 않는다.
시인 오규원은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다시 젖지 않는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젖은 구두의 방랑자는 쓸쓸하고 외롭다.
그래서 오늘 아침 따뜻한 햇빛에 손가리개를 하며
이 시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짐작과 다르다.
'시를 찾아보지 말걸 그랬나?'하는
비겁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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