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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가구(家具)의 힘 - 박형준

by tirol 2004. 11. 23.
가구(家具)의 힘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 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1991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Tracked from http://blog.empas.com/mimaing/2871298

* tirol's thought

고등학교 때이던가.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오신 장롱을 버리고 새 가구를 들여놓았을 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어머니께 한바탕 짜증을 부리고는 집을 뛰쳐나와 제풀에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미친놈처럼 한참을 쏘다녔던 기억이 있다.
외출에서 돌아와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눈에 익은 오래된 호마이카 장롱이 있어야할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새 가구를 발견하고 나는 마치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제부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다'라는 통보를 받은 아이처럼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문짝이 잘 맞지 않는, 잦은 이사로 모서리가 깨지고 칠이 벗겨진 오래된 가구를 바꾸고 싶었을 어머니를 이해하기까지는 그 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었다는 걸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