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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水墨정원 9 - 번짐 - 장석남

by tirol 2014. 4. 3.

水墨정원 9 -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tirol's thought


 어제 오랫만에 KBS FM의 '당신의 밤과 음악'을 듣다가 이미선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이 시를 들었다. (이미선 아나운서는 작년 말에 '당신의 밤과 음악' DJ에서 물러났는데 어제는 게스트 자격으로로 나왔다. 대학 시절부터 즐겨듣던 프로그램인데, 젊은 새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왠지 어딘가 허전하다. 이미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편하게 '번져가는' 수묵화 같은 목소리라면, 새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번짐' 없는 캔버스 위의 유화 같다고 해야할까?)

 지난 주 때 이르게 핀 목련이 번져 사라지고 있다. 곧 여름이 될 것이다.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되고, 가을은 번져 겨울이 되겠지, 그리고 다시 봄. 시간은 끝없이 어딘가로 번져가고 나도 어디론가 번져가고 있다. 번짐이 아름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번짐의 방향은 예측할 수 있으되 번짐의 형태는 가늠하기 어렵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