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 tirol's thought
겨울이 머지 않은 11월
머리를 득득 긁는 사람 같이 서 있는 나무
그 나무처럼 난감한 나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못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겨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나무처럼
아, 나도 생이 마구 가렵다
우물쭈물하다 보니 해지는 저녁 어스름
12월이, 겨울이 오고 있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저드 (0) | 2023.08.05 |
---|---|
슬라이스 (0) | 2023.07.25 |
우리들의 시간 - 박경리 (3) | 2022.11.03 |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 베르톨트 브레히트 (0) | 2022.08.12 |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 정호승 (0) | 2022.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