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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초원의 잠 - 김성규

by tirol 2008. 6. 4.
초원의 잠

김성규


오늘 하루는 피곤했습니다

씹고 있던 고기를 뱉어내듯 사내는 덩어리 기침을 토해낸다 엎드린 채 노트의 윗줄에 날짜를 쓰고 작은 글씨를 또박또박 심어가는 사내, 볼펜을 쥔 손가락에서 기름때가 배어나온다 종이 위에 찍힌 손자국 사이로 고추 모종처럼 띄어진 글씨가 몇개 부러져 있다 기침을 하자 사내의 몸통이 심하게 흔들리고 다시 글씨 하나가 부러진다 잠깐 물을 마시고 노트를 바라본다 그가 심어놓은 글씨들이 줄을 맞추며 여러번 고랑을 넘어간다 이렇게 한장의 종이를 채우자 며칠째 굶고 있던 일기장은 간신히 허기를 면한다 눈을 비비며 사내는 낮에 닦아놓은 엔진과 마모된 나사를 생각한다 살아가는 것은 조금씩 안락하게 마모되는 것, 사내는 엎드린 채 잠이 든다 기름때 묻은 손마디에서 이렇게 작은 글자들이 쏟아졌다니 … 글자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종이 밖으로 이파리를 피운다 사내의 얼굴로 푸른 그늘이 쏟아진다

/ 김성규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시선 288, 창비, 2008년 05월/

* source: 한겨레신문 '시인의 마을(2008.6.4)'


* tirol's thought

오늘 하루도 피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트에 손으로 일기를 써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의 일기장은 허기에 지쳐 이미 죽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이 아니라
먹는 시기도 일정하지도 않고 영양가도 없는 과자 부스러기 같은 나의 글쓰기.
피곤하지만, 그래도
푸른 그늘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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