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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나리 나리 개나리 - 기형도

by tirol 2008. 3. 21.
나리 나리 개나리

기형도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들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 tirol's thought

출근 길에 보니 아파트 담장 사이로
개나리들이 얼핏 노란색 꽃들을 피우려고 하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아니 봄이 왔다.
어제가 춘분이었으니 오늘부터는 낮이 밤보다 점점 더 길어질 것이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 봄'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잠글 수 없는 시간'은 오늘도 어김없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