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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by tirol 2008. 5. 7.

나무 한 권의 낭독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 2005/


* tirol's thought

오월의 푸른 나뭇잎들을 보면 나는 쓸쓸해진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일요일 오후, 휴일 자율학습 시간,
창문 밖으로 보이던 푸른 잎들
그 보다 어린 어느 시절, 밝고 환하던 어린이날 오후,
우우 소리치며 흔들리던 공설운동장 주변의 푸르고 큰 나뭇잎들
철없는 나는 괜한 아버지 얘기로 어머니를 울렸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내일 모레면 마흔이 되는
나는 여전히 오월의 푸른 나뭇잎들을 보며 쓸쓸하다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는 휴일 오후 창 밖엔
오늘도 푸른 나뭇잎들이 우우 소리내어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