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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by tirol 2008. 6. 12.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손택수, 《시평》, 2008년 봄호/
* source: 윤성택 시인의 좋은 시 읽기

* tirol's thought   

참, 아련하고 따뜻한 시다.

오늘 아침에는 출근하다가 문득 한 십년 쯤 후에 조그만 밥집 같은 걸 하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다. 너무 맛있고 분위기도 근사해서 미식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집도 아니고, 맛도 없고 색깔도 없는 그런 집도 아닌, 그냥 평범한 식당들보다 조금만 더 나은 그런 밥집. 아, 이게 이 집의 맛이구나, 분위기구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밥집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음식이든 취미든 지나친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예술의 경지' 운운하는 '음식'은 이미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밥은 밥이어야지, 꼭 예술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람이 먹는 게 밥이지 밥에 사람을 맞추라고 하면 되겠는가. 그렇다고 밥이란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일 뿐 맛 따위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생존지향형 몰취향'의 사람들을 보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밥은 미식가와 몰취향의 사이 어디쯤엔가 있다.

이 시를 읽다 보니 밥집이 아니라 세탁소를 열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하얀 스팀을 뿜어내'는 다림질을 하면서 아련하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감상적인 동경과 허영은 집어치우라.'는 말은 하지 마시라. 밥집이든 세탁소든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노동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 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얘기하는 밥집과 이 시 속의 세탁소가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어떤 따뜻함, 느긋함, 아련함 같은 것들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할 일은 많은데 일하기는 싫고, 주위가 쓸데없이 시끄럽고 번잡스럽다고 느껴질 때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내는 '아련한 소리'를 떠올려 보는 것이 뭐 그리 큰 죄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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