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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by tirol 2012. 2. 22.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source:http://goo.gl/DUy9H


* tirol's thought

병원에 있다는 시인을 생각하며 시를 읽는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아니,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던,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할 거란 걸 명백히 알고 있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쓰고 싶었던 )대학시절,  나는 어느 저녁 학교 경영관 강당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서 최승자 시인을 처음 보았다. 모교 출신의 시인들이 직접 시를 낭송하는 자리였는데 지금 기억나는 시인은 조정권 시인과 최승자 시인 둘 뿐이다. 조정권 시인은 '산정묘지' 시 중 하나를 낭송했던 것 같은데 최승자 시인은 뭘 낭송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강당 옆 복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줄담배를 피우던 그녀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집에 돌아가면 그녀가 번역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를 다시 들춰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회복을 기원할 수는 있겠지만, 기대하지는 못하겠다.
잠시 그의 아픔에 나의 슬픔를 슬쩍 맞대어볼  뿐.
시인이 꿈 속에서라도, 시 속에서라도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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