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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물속에서 - 진은영

by tirol 2012. 5. 8.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 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 tirol's thought

나는 수영을 못한다. 물이 무섭다.

하지만 시 속의 화자처럼
물속에서 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고, 물의 색도 바뀌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일들처럼.
그냥 잠이 잠처럼, 집이 집처럼, 바다가 바다처럼
그렇게 와서 그렇게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것으로 흘러와
내가 아는 것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고요히 바라본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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