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방죽 위에 서서 - 김갑수

by tirol 2001. 9. 16.
방죽 위에 서서

김갑수


그러나 사랑에는 순탄하든 험악하든 모두 제 갈길이 있는 것인데 이 사랑은 전혀 그런 길이 없는 것이에요

때로 방죽 위에 서서 저무는 하루를 굽어봅니다
날은 느릿느릿 멀어져가고
여울에 휩쓸린 물풀의 머리칼이 흔들립니다
바람에 내맡긴 이마를 흔들리는 머릿결이 덮어줍니다
새로 오는 하루는 언제나 처음인 양 하지만
하루의 전모는 마침내 습관일 뿐이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언제나 처음인 양
마음 가는 대로 기울고 흔들리던
분별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분별이 없어서 가문 들녘에 억새풀들만 웃자라는지
웃자라는 만남의 기억이 마른 살갗에
문신으로 따금뜨금 새겨집니다
이렇게 방죽 위에 오래 서서
떠나는 하루를 바라봅니다
아스라한 저 언덕 너머에 가여운 만남이 있었다고
저녁 하늘에는 병 깊어 어두운 별들이
살아갈 날의 마침표로 총총 박힙니다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김갑수 시집 '세월의 거지'/


* tirol's thought

언젠가 한동안 동아일보에 신경숙이 시를 골라 싣는 난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도 함께. 신경숙은 이 시에서 보이는 체념에 관해 '올바른 체념은 절망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정신의 몸조리'라고 이야기를 했다. 정신의 몸조리... 나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은 사랑을 체념해야 했던가.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 사랑이 분별없는 사랑이었는지 아닌지는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을 뿐이다.아니 체념했기 때문에 분별없는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사랑...사랑...체념 아니면 절망 뿐인 내 사랑...희망은 정녕 없는가?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 가야만 한다 - 최승자  (2) 2001.09.16
전염병동에서 - 김혜순  (0) 2001.09.16
절망 - 김수영  (0) 2001.09.16
울고 있는 가수 - 허수경  (0) 2001.09.16
사평역에서 - 곽재구  (3) 2001.09.16